인터넷 뉴스에서 펌
'며느리'자(字)가 들어간 꽃을 보면 슬프다. 고부간의 갈등을 표현한 꽃에 '
며느리'라는 이름이 붙었다. '시에미'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꽃이 없는 것을
보면 대체적으로 며느리는 한 가정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었기에 구구절절한
사연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.
며느리밑씻개에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.
한 시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다가 큰 일을 보게 되었다.
남이 볼세라 두리번거리며 일을 치르던 시어머니는 뒤처리를 위해서
손을 뒤로 뻗어 풀을 한 웅큼 잡아뜯어 밑을 닦았다.
그런데 무척이나 따가워 뭔가 보니 줄기에 잔가시가 송송 박힌 풀이었단다.
그때 시어머니 왈 "에잇, 이거 며느리면 밑 닦을 때나 걸려들지"해서 그 이름을 얻었단다.
왜 그 미움의 대상, 질투의 대상이 며느리일까?
어쩌면 어머니들의 심리 속에 며느리는 아들을 빼앗아간 경쟁대상이 아닐까
아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독점했는데 장가를 가고 나니 그 독점권을며느리에게 빼앗겼다는 같은 여자로서의 경쟁심리 같은 것이 고부간의 갈등을 일으키는것은 아닐까?
이렇게 생각해 보면 '사위사랑은 장모님'이라는 말도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.
자신의 남자(남편)의 사랑을 듬뿍 받던 딸을 가져간(?) 사위가 예쁠 수도 있겠다. 물론 상상이다.
실제 '사위질빵'이라는 꽃이 있다. 사위가 지고 일할 지게의 질빵을 툭툭 끊어지는 줄기를가진 풀로 만들어줘 처가에 온 사위가 쉬엄쉬엄 일하도록 배려해 준 장모님의 사랑이 배어 있는 꽃, 그래서 사위질빵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.
▲ 며느리밥풀꽃
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가 보기도 싫을 정도로 미웠다.
자기만 바라보고 살던 아들놈은 장가가더니만 며느리한테 푹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.
아들이 멀리 여행을 떠나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집에 남았는데 어느 날 며느리가 밥을 하다 뜸이 들었나 보려고 밥알을 두어 개 집어먹었다.
이 모습을 바라본 시어머니는 '네 이년 잘 걸렸다' 생각하며 몽둥이 찜질을 했다.
죽이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그만 며느리가 죽고 말았다. 아들이 돌아오자
어른이 먹기도 전에 밥을 혼자 먹어서 그랬노라고 변명을 하고, 며느리의 무덤가에는며느리의 입술처럼 붉은 꽃에 밥알 두 개가 얹혀 있는 듯한 꽃이 피었단다.
억울하게 죽은 며느리가 '나는 결백해요'하며 피어난 꽃이라 하여 며느리밥풀꽃이라는이름이 붙었단다.
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이 정도면 위의 추론을 억지라고만 몰아세울 수도 없을 듯하다.
이렇게 꽃에 담긴 사연들을 하나둘 알아가다 보면 우리 조상들의 상상력이 참으로 풍부해서 감탄하고,그저 붕뜬 이야기들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들이 들어있음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더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.
아무리 시대가 변해서 고부간의 갈등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'시'자(字)는 반가운 글자가 아닐 수도 있다.
▲ 며느리배꼽
며느리배꼽에 관한 전설은 들어 본 적이 없다. 단지 며느리밑씻개와 비슷하게 동그란 이파리 위에 배꼽같이 둥글둥글 둥근 것을 맺고 있으니, 그 유사성에서 며느리배꼽이라는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할 뿐이다.
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모양새가 마치 임신한 며느리의 배 같다는 것이다
.더군다나 이파리가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오면 영락없이
임신한 여인내의 배다.
설마하니 아무리 못된 시어머니라도 임신한 며느리까지 미울까?
그러나 아들이 귀한 집이거나, 딸만 줄줄이 난 집에서는 그 사정이 달라진다.
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식을 낳지 못하면(無子) 칠거지악의 하나로
쫓겨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임신한 기간 동안은 그 여느 때보다 평안(?)한
날들일지도 모르겠다.
그래서 그런지 다른 '며느리'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꽃보다는 덜 슬프게 다가오는
꽃이기도 하다.
그런데 배꼽을 닮은 것이 보랏빛으로 익어 가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,
며느리배꼽의 꽃을 본 적은 없다. 그게 꽃인지도 모르겠다.
보랏빛으로 익어가면서 안에 까만 씨앗이 맺힐 뿐, 피지 않는 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.
어미와 아가의 생명을 이어가게 했던 탯줄의 흔적이 배꼽이고 보면 활짝 피지 않고도 넉넉하게 씨앗을 맺어 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복중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.
간혹 들꽃들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.
이미 꽃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꽃들은 그 이야기가 상상력을
가로막을 때도 있지만 꽃말도 상징도, 이야기도 없는 꽃들은 이런저런
이야기들을 만들어주고, 의미 부여를 해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.
그리고 그 꽃을 보기 위해 꼬박 일년을 기다리면서도 지루하지가 않고
그 이전에 만났던 그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들을 만났을 때에는 또
다른 곳에 피어 있음이 감사하기만 하다.
가을 바람이 불어오면서 이불을 끌어당기기 시작하는 요즘,
며느리밥풀꽃이 궁금했었다.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을 만났던 오름은 30여분
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기에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.
그런데 이미 평지에서 화들짝 피어버린 그들이 지천에 깔려 있음을 보니 횡재를
한 듯한 기분이다. 그러고 보니 종류가 그렇게 많지도 않은 '며느리'자 들어가는 꽃이 한 계절에 피어 있다.
한 맺힌 며느리들끼리 모여 자신들의 신세를 털어내면서 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중인지도 모르겠다.
'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왜 앙숙일까?' 참 궁금하다.
나도 참 궁금하다...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영원히 답이 없는 숙제인것 같다..